한국전쟁 발발! 이승만 대통령은 어디에?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이 남한을 기습 남침한다.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작전명인 ‘폭풍’처럼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 전쟁 발발 이틀 뒤인 6월 27일 새벽, 국회는 ‘수도 서울 사수’를 결의한다. 이를 들고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를 찾아가지만 대통령은 자리에 없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한 순간, 이승만 대통령의 행방과 대응에 대해 알아본다.
함락된 서울, 무너진 한강교
1950년 6월 28일 새벽, 서울 한강교 위에는 피난을 가는 시민들의 행렬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국군은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한강교를 폭파한다. 결국, 폭발음과 함께 무너져버린 다리.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참사였다. 한강교 폭파는 적절했는지 살펴본다.
미국의 신속한 참전, 왜?
위기에 처한 한국정부는 미국과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하고, 개전 6일 만인 1950년 7월 1일, 미국 제 24사단 스미스부대가 한반도에 상륙한다. 미군은 오산에서 첫 교전을 벌였지만 결과는 대참패. 그러나 미국의 신속한 대응은 이례적이었다. 미국은 왜 이렇게 기민한 반응을 보인 것일까? 당시 미국의 의도와 국제정세를 자세히 살펴본다.
인천상륙작전, 북한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낙동강 전선까지 밀린 유엔군과 국군은 전열을 가다듬으며 반격을 준비한다. 마침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진다. 성공확률 1/5,000이었던 인천상륙작전. 하지만 사실 김일성은 이미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예상하고 있었다? 예상하고도 막지 못했던 김일성의 오판에 대해 알아본다.
되찾은 서울, 그 후
1950년 9월 28일, 서울 함락 세 달 만에 국군은 서울을 수복한다. 시민들은 희망과 기대를 갖기 시작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서울로 돌아온 이승만 정부는 한강 이북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부역자로 처벌하는데…
한국전쟁 개전과 서울 함락, 그리고 서울을 되찾기까지의 이야기. 또 앞으로 전개될 전쟁의 양상은 어떻게 될 것인지. 5월 19일 화요일 밤 10시 KBS 1TV <역사저널 그날> “6.25 개전 3일, 서울이 함락되다”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