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전선은 고지전으로 돌입한다”
1951년 7월, 휴전협상이 시작되지만, 전선에서는 참혹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유엔군과 북한군이 ‘계속 전투 원칙’에 합의했기 때문이었다. 전선이 고착화되자, 38선 부근에서는 진지전과 고지전이 치열하게 벌어진다. 특히 백마고지 전투는 열흘간 고지의 주인이 7번이나 뒤바뀐 처참한 교전이었다. 밤낮없이 포화가 쏟아졌고, 하루 사상자만 무려 천여 명이었다. 회담장에서 설전이 오가는 동안, 전장에서는 혈전이 멈추지 않는 참극. 한국전쟁의 마지막 총성을 따라가 본다.
역사상 가장 길었던 휴전협상
첫 휴전회담부터 긴장감이 감돌았다. 2시간 11분간 침묵 속 신경전이 오갔고, 교묘한 심리전 역시 빈번했다. 북한군은 회담장에 있는 유엔군 측 의자 높이를 줄여놓거나, 인공기를 유엔기보다 크게 제작하기까지 한다. 유엔군도 이에 대항해 회담장 주변에 오인사격을 퍼붓는 등 날선 대립은 그칠 줄 모르는데. 2년 동안 열린 회담만 575회! 압도적인 승리가 어려웠던 양측은 휴전협상에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맞서는데.
거제도 포로수용소 납치 사건!
‘포로 송환’ 문제를 둘러싸고 휴전협상이 난항에 빠진다. 북한 측이 억류한 유엔군 포로는 1만여 명인 데 반해, 유엔군 측의 공산군 포로는 무려 13만여 명이었기 때문. 10배 이상 차이가 나는 포로 수는 협상을 또 한 번 대치 상태로 몰고 가는데… 이때 1952년 5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의문의 납치 사건이 발생한다. 전쟁 막바지,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납치 사건을 살펴보고, 사건의 배후가 노린 것은 무엇인지 알아본다.
이승만 대통령의 벼랑 끝 전술?
미국과 소련에 새 지도자가 등장하면서 휴전협상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만이 휴전을 반대하며, 단독 북진을 주장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을 압박하기 위해 반공포로 석방도 불사한다. 분노한 미국은 이승만 제거 작전, 이른바 ‘플랜 에버레디’를 준비하는데.
마침내 찾아온 그날, 정전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전협정이 조인된다. 하지만 전쟁 당사국인 대한민국은 철저히 배제된 채 진행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정문에 서명하지 못하는데. 여전히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 이야기! 6월 2일 화요일 밤 10시, KBS 1TV <역사저널 그날> ‘휴전협정 – 고지를 사수하라’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