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 없이 찾아온 감염병이 우리 사회를 전례 없이 흔들어 놓았다. 확진자와 완치자의 수를 가늠하는 과정이 반복되는 사이, 가정과 사회에선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됐고, 수많은 사업장이 멈춰 섰다.
세계 경제는 흔들리고, 대량 실업은 우려가 아니라 현실이 됐다. 재택근무와 노동 약자, 기본 소득 등 수십 년 동안 서서히 진행돼오던 각종 사회 담론들이 한꺼번에 논쟁의 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코로나19는 한국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 KBS는 코로나19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조망하는 사회조사를 실시했다.
방역에 적극 참여하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코로나19를 기점으로 무엇이 변했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수많은 질문을 던졌고 답은 놀랍도록 희망적이었지만, 적지 않은 그늘도 감지됐다.
KBS는 이어 세계 석학들에게 물었다. 마이클 샌델 미 하버드 대 교수, 프랑스 최고 석학 자크 아탈리, <노동의 종말>로 유명한 제레미 리프킨 등 다양한 분야의 석학들에게 K-방역의 성과와 한국의 성취, 앞으로 한국 사회가 어디로 가야할 지에 대한 질문을 쏟아냈다.
당대의 최고 지성으로 꼽히는 그들은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날카로운 분석을 내놨다.
◆ 세계 석학들이 극찬한 K-방역 “한국은 더 이상 헬조선 아니다”
KBS 여론조사에서 대부분의 응답자는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고 답했는데,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고 있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95.8%에 달했고, 외출시 마스크 착용을 ‘항상 한다(80.3%)’는 답변과 실내 마스크를 ‘항상 착용한다(71.4%)’고 답한 응답자도 많았다.
겨울과 봄, 두 계절 내내 이어진 사회적 거리두기에 국민적 스트레스도 커, 사회적 거리두기로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응답(64.3%)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35.0%), 잘 모르겠다(0.7%)는 응답보다 훨씬 높은 비율을 보였다.
하지만 스트레스와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다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응답자 중 97.4%가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KBS 조사에 분석 자문을 맡은 서울대 임동균(사회학과) 교수는 “일각에서는 한국이 집단주의적 문화가 강해 강한 통제로 방역에 성공했다고 분석하는데, 이번 조사를 보면 오히려 수평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 공감 능력이 높은 사람들이 방역에 열심히 참여한 것으로 나왔다”고 설명했다.
국가 자부심과 단결력도 한층 강화돼, ‘한국은 희망이 없는 헬조선 사회’란 명제에 대해 ‘그렇지 않다’는 답변이 70%에 육박(67.8%)했다. 반면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생각하는 응답자는 25.9%에 머물렀다.
코로나19 이전인 지난해 4월 조사결과와 비교해보면 차이가 확연한데 응답자의 과반수 이상인 57.4%의 비율이 ‘그렇다’고 대답했던 것에 비해 2분의 1 이하로 줄었다.
한국과 선진국의 국가역량을 비교하는 질문에 ‘한국이 더 우수하다(39.2%)’고 답한 비율이 가장 높았고, ‘비슷하다'(30.5%), ‘선진국이 더 우수하다'(25.4%), ‘모르겠다'(4.9%)가 뒤를 이었다.
시민 역량으로 범위를 좁혀 한국과 선진국을 비교해달라는 질문에는 격차가 더 벌어졌는데, 과반수 응답자가 ‘한국이 더 우수하다(58%)’고 답했고, ‘비슷하다'(25.5%), ‘선진국이 더 우수하다'(14.1%), ‘모르겠다'(2.4%) 순으로 답변 비율이 낮아졌다.
◆ 프랜시스 후쿠야마 “한국, 수직적 신뢰 상승…언제든 무너질 수 있어”
<역사의 종말>에서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에 대해 논했던 정치경제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KBS와의 화상인터뷰에서 한국의 방역 성과에 대해 “한국의 방역에 대한 대응은 아마 세계 최고라고까지 얘기할 수 있다. 한국 정부는 신속히 대응을 했고, 우수한 전문성에 의존했고 또 협력이 잘 이루어졌다”고 평가했다.
<트러스트>에서 한국을 신뢰가 낮은 국가로 분류했던 후쿠야마 교수는 “제 책 ‘트러스트’에서는 주로 시민간 수평적 신뢰를 다뤘지만, 분명히 국가와 시민 사이의 수직적 신뢰관계도 있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는 한국이 코로나19 사태에서 상당히 높은 신뢰를 성취했다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신뢰는 사회의 영구적인 현상이 아니라 행위자들의 성과에 반응한다. 한국 정부의 경우는 신속하게 대응했고 정책을 굉장히 효과적으로 실시했고 국민들이 이를 신뢰했고, 미국은 연방정부의 대응도 무척 늦었고 무계획적, 무능력해서 국민들이 정부를 신뢰하지 않았다. 이는 단기적인 정부의 성과와 관련 있다”라며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 마이클 샌델 “K-방역에서 배울 점 많아…중요한 건 코로나19 위기 이후”
<정의란 무엇인가>로 잘 알려진 마이클 샌델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KBS와의 화상인터뷰에서 한국과 미국의 방역을 비교하며 “한국은 광범위한 검사와 접촉자 추적 등으로 신속하게 대응했다”라고 높게 평가했다.
미국 최고 정치 철학자로 꼽히는 샌델은 “코로나19 위기에서 가장 큰 정의의 문제는 혜택과 부담이 얼마나 잘 공유되는가 하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우리는 함께한다’는 구호를 듣고 있지만, 일부가 지나치게 많은 위험을 감수하는 반면 누군가는 위험을 덜 부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최전선에 있는 필수 인력들인 병원의 의사, 간호사 뿐만 아니라 배달원, 식료품 점원, 창고 근로자, 경찰, 소방관, 위생 근무자들에게 의존하고 있으면서 정작 그들에 대한 대우는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며 “이제 우리는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근로자들의 경제와 공동선에 대한 기여도를 어떻게 평가해야할지 고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 한국판 ‘위대한 세대’는 등장할 수 있을까
미국에서 ‘위대한 세대(The Great Generation)’는 1929년에 시작된 경제 대공황의 어려움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 혹은 후방에서 지원 사업을 해야만 했으며, 1950~1960년대 전후 복구사업과 경제건설을 통해 미국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만든 세대를 말한다.
이 위대한 세대는 가난과 전쟁이라는 어려움 속에서 용기와 희생, 연대라는 자질을 함께 키워나가며 자신들의 공동체인 미국을 세계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IMF 외환위기는 한국 사회에 ‘각자도생’을 남겼다. 코로나19는 우리 사회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지금 한국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중대한 질문을 받고 있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현대사에 보기 어려웠던 국가 자부심을 성취하고 K-방역을 통해 세계 속에 다시 자리매김하는 지금, 우리는 한국판 ‘위대한 세대’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