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광주,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차지한 신군부 세력에 맞서 광주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곧이어 벌어진 참혹한 학살. 많은 언론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광주에 잠입해 항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영상을 기록했고 이 영상들은 일본과 독일, 그리고 미국으로 전파됐다. 고국의 비참한 소식을 접한 교민들은 비디오를 재편집해 <광주 비디오> 상영회를 개최했다. 이렇게 해외에서 만들어진 <광주 비디오>는 국내로 밀반입돼 대학가와 성당을 중심으로 몰래 상영됐고 1987년 군부독재 타도를 외친 민주화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광주 비디오>는 40년간 공개되지 않았던 광주항쟁의 진실이 담긴 계엄군의 진실 은폐 현장과 민주화 항쟁을 이끌어냈던 <광주 비디오> 전파자들의 숨은 면면을 방송 최초로 공개한다.
■ 1989년 전두환 청문회와 <광주 비디오>
1989년 12월 31일, 국회에 전두환이 출석한다. 5공비리특위와 광주진상특위 연석 청문회에 출석한 전두환은 무고한 시민에 대한 발포와 학살을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이라 주장한다. 청문위원들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주장만을 반복하던 전두환은 청문회 자리를 유유히 떠난다. 그런데 이 청문회 위원들이 광주항쟁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시청했던 영상 자료가 있다. 이것이 바로 <광주 비디오>다.
■ 조총련이 만든 광주 비디오 <원한의 땅, 광주는 고발한다>
1980년 5월 22일, 뉴욕 한인회의 교민들이 모여 만든 ‘민주구락부’의 회장 민승연은 ABC 뉴스를 통해 광주항쟁의 소식을 접하게 된다. 다급한 마음에 한국으로 연락을 취해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당시 뉴욕에서 민주화운동을 해오던 박상증 목사를 찾아가 대책을 논의했고 광주의 진실을 알릴 수 있는 비디오를 제작하기로 뜻을 모은다. 자료를 모으던 그들은 재일조선인총연합회(이하 조총련)가 만든 비디오 ‘원한의 땅, 광주는 고발한다’라는 다큐멘터리를 입수한다.
“우리 민족사와 인류사에서 그 유례가 없는 동족 대학살 만행이 감행된 원한의 땅, 광주.
중무장한 악명 높은 공수특전대와 계엄군을 대거 동원하고
평화적인 광주 시민들을 개죽이듯이 학살하라는 특별 명령까지 내린 전두환 군사깡패도당”
– 조총련 비디오 ‘원한의 땅, 광주는 고발한다’ 中
조총련의 전위 조직이던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이하 한민통) 영화제작소 감독 니시다 테츠오는 조총련이 만든 <광주 비디오>의 감독과 친밀한 사이다. 그는 ‘피의 항쟁의 기록’이라는 광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1980년 6월에 제작하기도 했다. 이들 조총련과 한민통이 <광주 비디오>를 만든 이유는 일본 시민들에게 광주의 민주화에 관련된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조총련이 북한과 밀접하게 연관된 단체로 알려져 있어 이들이 만든 비디오는 당시 광주항쟁에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설의 근거로 여겨질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니시다는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일본에서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북측이 야기한 폭력사태라는 주장을 절대로 믿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전두환 정권의 문제라고 믿었으리라 생각합니다.”
– 前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영화제작소 감독 니시다 테츠오
■ 뉴욕 한인들이 제작한 <광주 비디오> ‘오 광주!’
민승연과 박상증 목사는 조총련이 만든 비디오를 보고 고민에 빠졌다. 이 비디오가 진실을 전달하더라도 조총련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관점을 제대로 실은 ‘민주화 운동으로서의 광주항쟁’이라는 진실을 전달할 수 있는 비디오 제작에 착수한다.
“그러면 광주를 제대로 알리는 비디오를 한번 만들자.
이제 자료를 모으기 시작합니다.”
– 前 세계기독교연맹 뉴욕지부 목사 박상증
민승연과 박상증 목사는 다큐멘터리 제작 경험이 있는 미국인 여감독을 섭외해 일본 NHK, 독일 ARD, 미국 ABC와 CBS 등의 뉴스를 모아 재편집했다. 비디오의 시나리오는 당시 뉴욕에서 동아일보 기자로 있었던 심재선 씨가 맡았고, 내레이션은 김응태와 이유정이 참여했다. 교민들의 노력으로 완성된 <광주 비디오> ‘오 광주!’는 1981년 5월 18일 뉴욕의 한 학교 강당에서 상영됐고, 이를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린 교민들은 항쟁의 진실을 접하고 눈물을 흘리며 분노했다.
■ 미국 ABC가 기록한 도청 진압 후 계엄군의 진실 은폐 현장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은 전남도청의 시민군들을 진압한다. 새벽에 수행된 작전을 기록한 비디오는 없다. 하지만 상황이 종료되고 난 아침 7시 무렵, 미국 ABC의 짐 로리 기자는 진압에 나섰던 계엄군의 입장을 묻는 인터뷰를 기록했다. 계엄군 대령은 시민측 사상자는 없으며 그들이 폭도로 부르는 시민군에서는 단 2명의 사망자만 나왔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현장을 둘러본 외신기자들의 눈에는 적어도 100구 이상의 시체가 확인됐다.
그리고 그날 저녁, KBS9시뉴스는 계엄군의 발표대로 폭도 2명의 사망을 기정사실화하는 가짜뉴스를 보도한다. 계엄군에 사살된 시민들의 숫자는 처음부터 왜곡됐고 그마저도 불순분자들이 일으킨 광주사태를 진압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포장된다. 하지만 당시 기록된 비디오는 발포 명령권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정황을 제공한다.
“이렇게 얘기를 해줘요. 오늘 이렇게 말씀하셨어.
계엄군이 말이야, 오늘 불가피하게 (시민군) 피를 흘리게 하지 않으면 안될… 그… 당위성을 말이야”
– 당시 전투교육사령부 사령관 소준열
■ <광주 비디오>를 전파한 명동성당 청년회와 천주교 광주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청년들
뉴욕에서 만들어진 ‘오 광주!’는 교민들의 노력으로 국내에 밀반입돼 대학가와 성당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상영된다. 서울 명동성당의 청년들은 1986년 5월, 열흘간 시민들을 대상으로 <광주 비디오> 상영회를 개최한다. 구름처럼 몰려든 시민들은 깊은 한숨과 눈물을 흘리며 군부독재 타도 구호를 외쳤다. 이에 힘을 얻은 명동성당 청년회는 전국의 성당을 통해 상영회를 이어간다.
천주교 광주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청년들은 직접 <광주 비디오>를 만들었다. 당시 독일 함부르크에 머물며 공영방송 ARD의 다큐멘터리 ‘기로에 선 한국‘을 입수, 번역해 설명까지 넣어 비디오를 만들었던 장용주 신부도 합세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비디오는 일일이 수작업으로 몇백 벌이나 복사됐고 삼엄한 검문을 피해 각 지역 성당으로 전달, 상영되게 이른다.
“이 <광주 비디오>가 결국은 한국 민주화를 촉진해준 촉매제 역할을 했다”
– 前 워싱턴 교민 고재형
<광주 비디오>는 단순한 기록물에 머물지 않고 1987년 민주화항쟁의 불씨가 됐다. 그리고 <광주 비디오>를 통해 전달된 광주의 민주화 정신은 수많은 촛불집회를 통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