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송에서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까지 이어지는 240km. 오지 중의 오지로 손꼽히는 깊은 산중에 자리 잡은 외씨버선 길은 조지훈 시인의 시 ‘승무’에 한 구절에서 그 이름을 빌려온 옛길이다.
산이 깊으니, 사람의 시간도 더디 흐르고, 변함없는 풍경 속에 순하게 살아온 산촌 사람들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곳. 사뿐사뿐, 버선발로 걷듯, 천천히 걸으며 만나는 외씨버선길의 오래된 맛의 이야기!
■ 외씨버선길의 시작, 청송 주왕산 계곡 – 길 따라 흐르는 여름날의 추억
외씨버선길의 시작은 청송 주왕산 계곡. 쏟아지는 시원한 물줄기가 사람들을 부르는 대표적인 피서지다. 외씨버선길을 따라 학교를 오가며 어린 시절을 보낸 청송 사람들에게 여름은 약수의 계절. 여름이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달기약수터는 솟아나는 물소리가 고고고 닭의 울음소리를 닮아 붙은 이름이란다. 탄산과 철분이 많이 들어있어 톡 쏘면서도 독특한 맛이 나는 달기약수는 먹기 좋게 설탕을 타서 음료수처럼 마시기도 하지만, 밥을 짓고, 백숙 끓이는데도 한몫을 톡톡히 한다.
부처손 등 주왕산에서 채취한 귀한 약초들을 넣고 끓인 약수백숙에 약수로 지은 영양밥은 여름 보양식으로 손색이 없다. 음식뿐 아니라, 염색을 돕는 매염제로도 활용하는 약수는 청송사람들에겐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
약수 뜨러 가는 날이면 꼭 챙기는 음식은 ‘장떡’, 짭짤한 장떡을 한입 먹고 약수를 많이 마시기 위해서였다. 여름 장떡에는 제철 맞은 골부리(다슬기) 삶은 국물로 반죽을 하고, 골부리살을 넣어 색다른 맛을 낸다. 여기에 골부리를 삶아 만든 새콤한 냉국에 고추장에 박아둔 파로 만든 골부리조림까지, 추억이 있어 더 맛있는 청송 사람들의 여름 별미를 만난다
■ 길에서 찾은 삶의 쉼표 – 영양 귀촌 부부의 자연밥상
청송에서 영양으로 이어지는 외씨버선길은 산간 내륙에 자리 잡은 산촌을 지난다. 육지 속 섬이라 불리던 영양은 사람의 발길을 쉽게 허락하지 않은 덕분에 깊은 산속, 천연기념물로 보호 중인 산양이 살고 있을 만큼 청정한 생태환경을 간직한 곳.
귀촌할 곳을 찾아 전국을 다니던 중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영양에 반해 자리 잡았다는 이상철, 김길숙 부부. 산과 들을 마당 삼아 살다 보니, 먹을거리부터 달라졌다.
질경이와 개망초, 들판에 덩굴로 자라 농부들에겐 골칫덩이로 불리는 환삼덩굴까지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잡초들이 맛있는 식재료로 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라이스페이퍼에 온갖 풀을 넣고 만든 풀쌈과 잡초샐러드.
김 대신 곰취에 밥과 채소를 넣고 만든 곰취말이밥, 삶은 감자로 감칠맛을 더한 열무김치에 말아 먹는 국수 한 그릇까지. 낯선 길을 함께 걸으며 더 깊어지고 맛있어진 부부의 자연 밥상을 만난다.
■ 보부상들의 삶의 애환을 품은 외씨버선길 – 봉화 생달마을 이야기
조지훈 시인의 시에서 이름을 얻은 외씨버선 길은 소설가 김주영이 소설 ‘객주’를 완성하기 위해 걸었다고 알려진 길이기도 하다. 길이 시가 되고, 소설이 되는 그 여정 속에는 험하고 고된 길을 오가며 살아온 보부상들의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소설 객주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봉화 오전리 생달마을은 실제로 11명의 보부상이 모여 살았던 곳이다. 가족도 없이 외롭고 고단한 삶을 살았던 보부상들은 후손도 없이 세상을 떠나며, 자신들이 살던 땅을 마을에 남겼고, 마을 사람들은 위령탑을 세우고, 매년 제사를 모시며 그 마음을 기리고 있다.
사상에 오르는 술은 직접 담근 막걸리를 올리는데, 이때 물 대신 사용하는 약수가 바로 보부상들이 발견했다는 오전약수다. 조선 시대 약수대회에서 1등을 했다고 할 만큼 맛과 효능이 좋은 약수를 물 대신 넣고 겨우살이 약초를 넣어 막걸리를 빚으면, 안주로는 맑고 깨끗한 물에서 자라 크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민물새우튀김이 제격이다. 술 익는 냄새가 마을에 퍼지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오래전 여름의 추억 놀이를 시작한다.
제땅을 파고, 위에 돌을 올린 다음 온갖 먹을 것을 올리고, 칡넝쿨과 흙으로 덮어 찌는 일명 삼굿! 이맘때 즐겼던 삼굿의 주인공은 은어다. 낙동강 상류지역에 자리 잡은 봉화는 여름이면 은어가 가장 흔하게 잡혔다.
수박향이 난다는 은어를 호박잎에 싸서 찌면, 그 담백함이 입에서 살살 녹는다. 은어가 흔하게 잡힐 때면 말려두었다 국물을 낸 다음 차갑게 식혀 국수를 말아 먹기도 했다. 보부상들의 땀내 가득한 애환을 간직하며 살아온 마을 사람들의 오래된 추억이 담긴 옛 음식들을 만나본다.
■ 영월 김삿갓 계곡, 먼 길 돌아 고향으로 돌아온 형제의 여름 강 추억
외씨버선길의 마침표를 찍는 곳은 강원도 영월 김삿갓 계곡. 조선 시대 방랑시인 김삿갓이 마지막 여생을 보냈다는 곳이다. 객지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엄재헌씨 형제는 여름이면 매일 계곡에 나와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큼직한 사발에 천을 덮고 다슬기를 찧어 발라 미끼를 쓰는 옛날 보쌈잡이와 잠자리 유충을 미끼로 꺽지를 잡던 여름날의 추억이 어제처럼 생생한데, 흔하게 잡히던 민물고기들이 이젠 귀한 신세가 됐을 만큼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래도, 오래전 즐겨 먹던 음식만큼은 아직 그대로다. 어머니 손맛을 기억하며 두 형제가 손 걷어붙이고 만들어보는 민물고기 음식들!
민물고기를 다져 반죽해 만드는 민물고기 원반죽과 완자튀김, 그리고 쌀 대신 감자를 갈아 넣어 구수하고 담백한 감자어죽까지, 추억의 여름 별미들이 상에 오른다. 뜨거운 어죽을 물 위에 띄워 놓고, 물놀이 하면서 식혀 먹으면 여름 더위쯤은 거뜬하게 이겨 낼 힘이 생긴다는데.. 먼 길을 돌아 다시 고향에 돌아와 부모님과 함께 추억의 음식을 나누는 두 형제의 여름 별미를 만난다.